삶과 죽음이 맞닿아있어…죽음에 대해 더 활발히 논의해야
동서양의 차이가 죽음에 대한 태도 차이 만들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예외는 없다. 이때문에 ‘죽음’은 근원적인 공포의 대상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과 단절, 소외 등의 단어가 죽음과 겹쳐진다.
고독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지만 친인척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맞는 죽음도 공포의 대상인 것은 마찬가지다. 요컨대 사람은 누구나 죽고 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서양에서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로 죽음을 자꾸만 되새기며 삶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런데 왜 동양에서는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까?
유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공자는 제자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겠느냐!(未知生焉知死)”라고 외쳤다. 죽음보다 삶이 중요한 것이니 죽음 후의 세계, 특히 제사 등으로 대표되는 미신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산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귀신 섬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공자의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이처럼 공자가 내비친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후대로 이어졌다.
이후 동양에서는 죽음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태도로, 삶에 집착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은 삶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리 혹독한 환경에서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심경을 담은 이 속담은 생을 향한 사람들의 강렬한 의지를 북돋았다. 이 같은 삶의 태도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분야로 이어져 대다수의 사람은 죽음보다는 삶을 이야기하고 노래한다.
사실 우리의 눈앞에는 언제나 죽음이 펼쳐져있다. 언제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것이 생(生)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행사 때문에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다 투신자살하는 사람에 부딪쳐 숨진 공무원 가장이 있다. 얄궂게도 공무원과 부딪친 사람도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었다. 이처럼 삶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삶과 맞닿아있는 죽음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서양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다. 기독교에서는 사후 심판을 받고 가는 곳이 천국 혹은 지옥으로 나뉜다고 한다. 이때문에 살아생전에 사랑을 실천하고, 낮은 데로 임하는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을 한다. 서양인에게 죽음은 슬픔이 아닌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계기다. 이때문에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한다.
서양과 기독교의 정서를 100% 받아들이기는 힘들더라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야한다. 삶만큼이나 소중한 죽음이 우리를 피해가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고, 죽음의 의미를 되시길때 비로소 삶의 의미도 더욱 소중히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