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의 법조계 폭로를 기점으로 시작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문화계에 이어 정치권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정치권 내 성폭력 사건이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사례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자 대한민국 전체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나아가 안 전 지사 사건이 터진 날 국회에서 실명을 내건 첫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향후 정치권에서 유사한 피해 사례들이 속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 씨는 지난 5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대선이 끝난 지난해 6월말 이후 8개월간 안 전 지사로부터 4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의 폭로 직후 더불어민주당은 긴급 최고위원회를 소집해 안 전 지사에 대한 출당 및 제명 조치를 했고, 추미애 대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당 대표로서 피해자와 국민께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침묵을 지키던 안 전 지사도 6일 새벽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모든 분들께 정말 죄송하고 무엇보다 저로 인해 고통 받았을 김지은 씨에게 정말 죄송하다"며 "오늘부로 도지사 직을 내려놓겠다. 일체의 정치 활동도 중단하겠다"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안 전 지사 성폭력 사건이 불거지자 정부여당을 향한 야권의 비난이 줄을 잇고 있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은 5일 논평을 통해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이렇게 와 닿을 수가 있느냐"라면서 "배신감이 차올라 치가 떨린다"고 비난했다.
그는 "피해자 수행비서의 눈물의 폭로를 듣고 있자니 안 지사는 참 나쁜 사람"이라며 "당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까지 충격적인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더불어민주당은 역대 최악의 성추행 정당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바른미래당도 논평을 내고 "안 지사는 성폭력이 폭로된 바로 오늘(5일) 도청행사에서 '미투 운동은 인권 실현의 마지막 과제로 우리 사회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는 강연까지 했다"며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문구를 안 지사가 말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꼬집었다.
안 전 지사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정치권에서는 뒤늦게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 해결에 목소리를 높이는 모양새다.
민주당은 5일 긴급 최고위원회의에서 젠더폭력TF(태스크포스)를 특별위원회로 격상시켰다. 또 국회 내 미투에 대응하기 위한 성폭력 범죄 신고상담센터를 설치하고, 외부 젠더 전문가가 참여하는 인권센터도 국회 차원에서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한국당은 '여성폭력추방대책특위원회'(가칭)를 출범시켜 성희롱, 성추행 및 성폭력 문제에 대한 당론을 정하고 탄력적 대응을 할 예정이다.
바른미래당은 안 전 지사 논란에 대한 특검을 추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각 당이 나름의 대응책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정치권에서는 추가 피해자가 등장에 대한 우려감을 나타내고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의 중심에 있는 정치권이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지만 그 내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독한 갑과 을의 관계 속에서 갖은 수모를 견디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정당 사무처 관계자나 국회 보좌진 중에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라며 "소위 생계형 보좌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나 상사들의 부당한 지시에 반기를 들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고 토로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따지고보면 국회 만큼 구악(舊惡)이 심한 곳도 없을 것"이라며 "성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나 행동 등으로 여성 보좌진들을 당황케 하는 사례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국회에서 발생한 첫 미투 운동은 국회 내 잔존해 있던 성비위 사건들에 경종을 울리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어 주목된다.
지난 5일 자신을 국회의원 비서관이라고 밝힌 정 모 씨는 지난 국회 홈페이지 국민제안 코너에 '(#me too) 용기를 내보려 한다'는 제목의 글을 올려 "지난 2012년부터 3년 여간 근무했던 의원실에서 벌어진 성폭력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당시) 4급 보좌관인 그 사람(가해자)은 회관에서 함께 일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지만 직장 상사 관계로 묶이기 시작한 뒤 장난처럼 시작된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반복됐다"고 말했다.
그는 "'뽀뽀해 달라'는 성희롱성 발언과 각종 음담패설은 물론 부적절한 신체 접촉도 계속 됐지만 생계형 보좌진인 저는 그냥 견디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며 "지금도 술을 마시거나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고 비슷한 사건이나 기사를 보는 날이면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악몽을 꾼다"고 덧붙였다.
이 글이 올라오자 하루 뒤인 6일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보좌진이 현재 몸담고 있는 의원실에서 면직 처리됐다.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지난 19대 국회에서 발생한 직장 내 성폭력 사건 가해 당사자가 현재 저희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며 "제 보좌관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해당 보좌진을 면직 처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제가 국회에 있었던 기간은 아주 짧지만 국회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와 폐쇄성은 잘 알고 있다"며 "그래서 글을 쓰기까지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용기와 고민이 필요했을지 충분히 공감하고 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한 국회 관계자는 "이번 국회 미투 운동으로 많은 이들이 놀랐지만 동시에 이제는 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 돼 있다"며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여겨져 온 나쁜 습관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완전히 제거되길 바란다"고 했다.